[기후는 공공재입니다]
(14) '기후 붕괴' 시대, 종교인이 사는 법
발행일 2021-07-18 [제3254호, 8면]
■ ‘인간세’와 ‘자본세’의 시대
생태계 현실을 말함에 있어 ‘위기’란 말보다 ‘붕괴’라는 거친 용어를 선호하며 사용해 왔다. 지리학적으로 뭇 생명체의 탄생, 존속 그리고 번영이 가능한 ‘홀로세’ (Holocene Epoch, 沖積世) 말기에 이르렀으나 홀로세를 ‘인간세’, 나아가 ‘자본세’로 변질시킨 탓이다. 한 마디로 ‘탈결핍’을 추동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생명현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성경의 창조기사는 홀로세를 살았던 인간들의 고백이었다. 이를 자본세로 바꾼 오늘의 인간들은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을 말할 수 없고 믿기도 어렵다. ‘참 좋았다’는 하느님의 환호를 절망으로 바꾼 까닭이다. 이로써 그분의 아들 예수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든 세상, 하나 밖에 없는 지구도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고 있다. 로마서 8장이 증언하는 ‘피조물의 탄식’이 바로 그 실상이다.
■ 구원은 ‘뉴 노멀’을 사는 길
최근 「2050 거주 불능 지구」(추수밭)라는 책이 출판됐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 공간인 지구를 위한 시간이 30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2050년 탄소제로 사회를 만들고자 기를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1년 넘게 기승을 부리는 것도 파괴된 지구 생태계의 역습이다. 바이러스도 생명체인 바, 자연 파괴로 서식지를 잃은 그것이 인간에 기생하며 살려고 기를 쓰고 있다.
바이러스는 결코 백신으로 해결될 수 없다. 거듭 변종이 생겨날 것이며 영구 동토 해빙으로 정체불명의 뭇 바이러스가 대기 중에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악마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문명의 교정자’로 인식하고 우리의 삶과 신앙 양식을 달리하는, 즉 ‘뉴 노멀’을 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은 ‘뉴 노멀’에 따라 살 것을 요구했고, 예수가 선포한 구원 역시 당대와 다른 삶, 곧 ‘뉴 노멀’의 길이었다.
■ ‘탈성장’의 극복
이를 위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그린 뉴딜, 디지털 뉴딜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지구 온도를 상승시키는 탄소 대신 태양, 바람, 바닷물, 수소 등에서 새 에너지를 얻고자 경쟁한다. 디지털 혁신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가 성장을 목표로 삼고 있으니 걱정스럽다.
아무리 좋은 기술일지라도 반대급부, 부작용이 있다. 그렇기에 기술절대주의의 환상을 경계해야 옳다. 정녕 지구를 생각한다면 ‘탈성장’을 말해야 한다. ‘탈성장’은 파이를 키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성장과 다르며 파이가 작아지는 역성장과도 변별된다. 이웃과 나누고 자연을 돌보는 일에 가치를 둘 때 거기서 또 다른 의미의 성장이 비롯될 수 있다. 최근 회자되는 기본소득, 기본 자산의 주제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를 위해 종교의 역할이 있겠고 종교인의 공감적, 생태적 삶이 더 요구된다.
■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삶
생태계 복원을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다. 무너지는 생태시스템의 규모가 너무 엄청나기에 한 개인의 의지만으로 흐름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이 다수가 되어 정책을 바꿀 수 있고 다른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들 스스로가 천지창조의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인간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교, 즉 ‘자본교’라는 아픈 현실과 맞서야 마땅하다. 이를 위해 필자는 종교인에게 ‘단순성’(Simplicity)의 가치를 살라고 요청한다. 최소한의 물질로 살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물질은 물질 그 이상으로서 정신과 진배없다. 탈결핍을 미덕이자 축복으로 가르치는 종교는 자본주의 이념과 다르지 않다.
지난 세기에 경험했듯이 자유와 평등의 이념만으로 ‘살만한 세상’은 만들어질 수 없다. 박애 혹은 공감의 삶이 요청되는 이유다. 이는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삶에 달려있다. 그것이 사람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살리는 길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
■ 절뚝거리며 걷기
이런 삶을 위해 ‘은총의 감각’을 말하고 싶다. 은총이란 삶에 있어 “최상의 것을 거저 얻었다”는 고백이리라. 십자가로 표현되는 적색 은총, 자연이 주는 녹색 은총, 이 둘은 그것 없이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최상의 것을 일컫는다. 이렇듯 은총의 감각을 지닌 사람만이 경건의 능력을 지닌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다.
은총의 감각을 지닌 사람은 결코 ‘탈결핍’을 지향하지 않는다. 삶 자체가 은총이기에 얼마든지 단순하게 살 수 있고 자연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은총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이들로 인해 자연 또한 회복 가능할 것이다. 탄식하는 피조물들이 하느님 자녀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이 이를 적시한다.
마지막으로 ‘절뚝거리며 걷는 야곱’의 메타포를 말하고 싶다. 일명 ‘느림’의 미학이자 영성이다. 야곱이 엉덩이뼈를 다쳐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 없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살게 된 전 과정을 복기해 보자. 야뽁 강변에서 진정한 자아와 대면하며 이전 삶을 포기했던 그에게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이 주어졌다. 절뚝거리며 걸었기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뭇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본세를 홀로세로 돌려놓기 위해서라도 종교인들은 모두 이웃, 자연과 공감키 위해 절뚝거리며 걸어야 한다. 한 독일 철학자의 말로 짧은 글을 마감하겠다.
“지금 대재난을 겪고 있는 지구가 고통받고 있는 신의 모습이 되어 인류에게 ‘지금 너의 삶을 달리 만들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정배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현장아카데미 원장)